도다이지 절의 역사

History of Todai-ji Temple

東大寺(도다이지)는 聖武天皇(쇼무천황)의 황태자 基親王(모토이신노)를 추도하기 위하여 神龜5년(728)에 세워진 金鐘山寺(긴쇼산지)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즉 이 金鐘山寺는 天平(덴표)13년(741)에 金光明寺(기코묘지)・法華寺(호케지)라는 두 곳의 國分寺(고쿠분지:官寺(관사))를 건립한다는 천황의 조서가 발표된 뒤 大和國(야마토국) 金光明寺(긴코묘지)로 승격되었고, 이후 東大寺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天15년(743)에 卢舍那大佛(노사나대불)을 조성한다는 조서가 발표되고 수도가 紫香樂(시가라키)에서 平城(헤이조)로 되돌아가자, 大和國 金光明寺에서 노사나대불의 제작이 시작되어 天平21년(749)에 완성되었다. 동시에 大佛殿(다이부쓰덴:금당)의 건립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天平勝寶4년(752)에 성대한 開眼供養會(개안공양회:완성 법회)가 열렸다. 그 후 서탑과 동탑, 강당과 三面의 승방 등이 造東大寺司(조동대사사)라는 기구의 주도 아래 건립되어 소위 東大寺의 七堂伽藍(칠당가람)이 순차적으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東大寺는 國分寺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천하태평・만민풍락을 기원하는 사찰인 동시에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학승을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도 지니고 있어서, 화엄을 비롯하여 奈良(나라)시대의 六宗(육종), 그리고 平安(헤이안)시대의 天台宗(천태종)과 眞言宗(진언종)을 포함한 각 종파의 연구소가 설치되어 八宗(팔종) 겸학의 학문 사찰이 되었다.

平安시대에 들어서 齊衡2년(855)의 대지진으로 대불의 머리 부분이 몸체에서 분리되는 손상을 입었는데 이는 眞如法親王(신뇨호신노)의 후원으로 수리되었다. 하지만 이후 화재나 벼락 등에 의해 강당과 삼면 승방, 서탑 등이 소실되고, 남대문과 종각도 붕괴되었다. 더구나 治承4년(1180)에 平重衡(다이라노 시게히라)의 군대에 의해 大佛殿을 비롯한 가람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그러나 다음해에는 俊乘房重源(슌조보 조겐)이란 스님에 의해 사원의 부흥이 시작되어 文治元年(1185)에 後白河法皇(고시라카와호오)를 主導師(주도사)로 하여 복원된 대불의 開眼供養會가 거행되었다. 다음해인 文治2年(1186), 周防(스오) 지역이 東大寺 재건을 위한 목재의 공급처(料所)로 지정되면서부터 부흥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建久6년(1195)에 大佛殿의 落成(낙성)을 기념하는 법회가 열렸다. 이러한 부흥과 더불어 침체 기미에 있던 교학활동도 활발해져, 鎌倉(가마쿠라)시대에는 많은 학승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永祿10年(1567)에 이르러 三好・松永(미요시・마쓰나가)의 난 와중에서, 二月堂(니가쓰도)와 法華堂(호케도), 南大門(난다이몬)과 轉害門(데가이몬), 正倉院(쇼소인)과 종각 등 약간의 건물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 때는 소위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東大寺의 부흥은 몹시 어려움을 겪어, 대불의 머리 부분도 동판으로 덮는 간단한 수리 정도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본격적인 재건은 江戶(에도)시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는데 公慶上人(고케이쇼닌)이 전국 勸進(권진:시주를 청함)과 大名(다이묘:영지를 소유한 무사)들이 협력해 주도록 幕府(막부)가 힘을 써 달라고 간원하였고, 그 결과 부흥에 착수하여 대불의 開眼供養會와 大佛殿의 落成供養會를 元祿5년(1692)과 寶永6년(1709)에 각각 거행할 수 있었다. 이후 사찰의 정비는 역대의 大勸進職(대권진직:시주 등을 권하고 관리하는 직책)에 의해 계속되었다.

明治(메이지)시대의 神佛分離令(신불분리령)과 사원 소유의 토지 몰수는 東大寺의 존립에 위기를 초래하였고, 종제상 華嚴宗(화엄종)으로 분류되는 등 사원 개혁이 강요되었지만 그래도 明治・昭和(메이지・쇼와) 연간의 大佛殿 대수리를 시작으로 하여, 부속 사원 등 모든 가람의 유지에 힘을 기울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東大寺는 그 역사만큼이나 귀중한 문화유산을 현재까지도 많이 소장하고 있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二月堂의 修二會(슈니에)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불교 의례의 보고이기도 하여, 매년 일본 전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